할리드 이븐 알왈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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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는 쿠라이시 부족 출신으로, 초기에는 이슬람 군에 맞서 싸웠으나, 이후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무함마드의 지휘 아래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그는 625년 우후드 전투에서 메카 군대의 기병대를 지휘하여 무슬림 군대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으며, 628년에는 후다이비야 조약 이후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개종 후에는 무타 전투에서 뛰어난 지휘 능력을 발휘하여 '신의 칼'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리다 전쟁과 이라크 및 시리아 정복에 참여하여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아부 바크르 시대에 시리아 무슬림 군대의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야르무크 전투 이후 해임되었다. 할리드는 수니파 무슬림에게는 전쟁 영웅으로 여겨지지만, 시아파 무슬림에게는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642년경에 사망했다.
할리드의 아버지 알왈리드 이븐 알무기라는 헤자즈(서부 아라비아) 메카에서 분쟁 중재자 역할을 했다.[1] 그는 쿠라이시 부족의 주요 씨족이자 메카의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 귀족 가문인 바누 마흐줌 출신이었다.[1] 마흐줌 가문은 남아라비아의 예멘과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에 메카 상업을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쿠라이시족 사이에서 지혜, 고귀함, 부유함으로 명성이 높았다. 할리드 아버지의 삼촌 히샴은 '메카의 영주'로 불렸고, 그의 사망일은 쿠라이시족이 달력의 시작으로 사용하기도 했다.[1] 역사학자 무함마드 압둘하이 샤반은 할리드를 그의 씨족과 메카 전체에서 "상당한 지위의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628년 쿠라이시족과 무함마드 사이에 후다이비야 조약이 체결되면서 메카 시내에도 이슬람의 가르침이 퍼졌고, 할리드도 이때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는 원래 메카의 쿠라이시족을 따르는 기병대장이었으며, 초기의 이슬람 군과의 전투에도 참전했다. 625년 우후드 전투에서 2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이슬람 군의 배후를 공격하여 무함마드를 부상시키는 데 성공했다. 628년 후다이비야 조약이 쿠라이시족과 무함마드 사이에 체결되자, 메카 시내에도 이슬람의 가르침이 퍼지면서 할리드는 이 때 개종했다.
무함마드 사후,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할리드는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아부 바크르는 할리드를 나지드의 반군 부족에 파견했고, 할리드는 상당한 작전적 독립성을 보여주었다. 할리드는 부자카 전투에서 툴라이하의 군대를 격파하고 나지드 대부분을 장악했다.[1]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는 무함마드 사후 초대 칼리파인 아부 바크르에게 군권을 위임받아 이슬람 제국의 확장에 큰 역할을 하였다.
할리드는 아부 바크르의 명령에 따라 시리아로 이동하여 그곳에 주둔해 있던 무슬림 군대를 지원했다. 634년 4월 초, 할리드는 시리아로의 행군을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할리드는 시리아 주둔 무슬림 군대의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알-발라두리, 알-타바리, 이븐 아담, 알-파사위 및 이븐 후바시 알-아사디가 인용한 기록에 따르면, 아부 바크르는 장군의 군사적 재능과 기록을 이유로 이라크에서 시리아로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할리드를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우마르 칼리프는 할리드를 최고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해임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할리드의 명성에 대한 우려, 군사적 권력 집중, 우마르와의 개인적인 반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해임 이후에도 할리드는 아부 우바이다 휘하에서 군사 활동을 계속했다. 할리드는 아부 우바이다와 함께 북쪽으로 진군하여 636~637년 겨울 호мс(비잔틴 제국에서는 에메사)를 포위 공격했고, 이듬해 봄 호мс는 항복했다. 항복 조건에 따라 주민들에게 세금이 부과되었고, 재산, 교회, 물레방아, 도시 성벽은 보호받았다. 성 요한 교회의 4분의 1은 무슬림이 사용하도록 남겨졌고, 버려진 집과 정원은 무슬림 군대와 그 가족들에게 분배되었다.[1] 호мс는 사막 스텝 지대와 가까워 아랍 부족민들에게 유리한 정착지로 여겨졌고, 시리아에서 무슬림 인구가 많아진 최초의 도시가 되었다.[1]
할리드는 642년에 메디나 또는 홈스에서 사망했다. 그의 군사적 업적은 이슬람 세계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알라의 검'이라는 칭호는 그의 용맹함을 상징한다. 현대 아랍 세계 곳곳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존재한다.[1]
칼리드의 시리아 사막 횡단은 그의 군사 작전 중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 중세 시대 이슬람 정복 문학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케네디는 이 사막 횡단이 "역사와 전설에 각인되었다. 아랍 자료는 그의 [칼리드의] 지구력에 경탄했고, 현대 학자들은 그를 전략의 달인으로 보았다"라고 기록했다.[1] 이 횡단은 "확실하며, 기억할 만한 군사적 지구력의 업적"이며, "시리아에 그의 도착은 그곳에서 무슬림 무기의 성공에 중요한 요소였다"라고 케네디는 주장한다.[1] 모셰 길은 이 횡단을 "비할 데 없는 업적"이며 "뛰어난 사령관으로서의 칼리드의 자질"에 대한 증거라고 평가한다.
2. 초기 생애와 가문
할리드의 어머니는 바누 힐랄 부족 출신으로, 루바바 알수그라('젊은 루바바')로 알려진 알-아스마 빈트 알-하리트 이븐 하자였다. 루바바 알수그라는 622년경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며, 그녀의 이복 자매인 마이무나는 무함마드의 아내가 되었다. 할리드는 어머니 쪽 친척을 통해 베두인(유목 아랍인) 생활 방식에 익숙했다.
할리드는 Khath'am 부족의 족장이자 시인이었던 아나스 이븐 무드리크의 딸 아스마와 결혼했다. 그들의 아들 압드 알라흐만은 아랍-비잔틴 전쟁에서 뛰어난 지휘관이 되었고, 시리아 총독이자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창시자인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또 다른 아들 무하지르는 제1차 무슬림 내전 중 시핀 전투에서 알리의 편에서 싸우다 사망했다.
할리드 가문의 구성원들은 이후 역사 기록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했다. 11세기 역사가 이븐 하즘에 따르면, 750년경 시리아에서 발생한 전염병으로 할리드의 남성 후손 40명이 모두 사망하면서 그의 남성 혈통은 끊겼다.
2. 1. 가계
할리드는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 중에서도 유력한 가문인 바누 마흐줌 출신이다.[1] 아버지 알왈리드 이븐 알무기라는 메카에서 지역 분쟁 중재자로 활동했으며,[1]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 귀족 계급의 일원이었다.[1] 어머니는 루바바 알수그라로, 유목민 부족 출신이며, 그녀의 이복 자매는 무함마드의 아내가 되었다.
2. 2. 초기 군사 경력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는 메카의 쿠라이시족 기병대 일원으로, 초기 이슬람 군에 맞서 싸웠다. 625년 우후드 전투에서 무슬림 군대를 격파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무함마드에게 부상을 입히기도 했다. 628년 후다이비야 조약 이후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629년 9월, 무타 전투에서 무함마드는 할리드에게 Sayf Allahar ('알라의 검')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 전투에서 이슬람 군은 동로마 제국 군에 의해 패배하고 자이드를 포함한 지휘관들이 사망했으나, 할리드는 궤멸 직전의 군대를 수습하여 안전하게 철수시켰다.[1]
무함마드 사후, 할리드는 초대 칼리파 아부 바크르 휘하에서 이슬람 제국의 확장에 기여했다.
3. 이슬람으로의 개종
무함마드가 아랍 세계를 통일한 후, 이슬람은 사산 왕조와 동로마 제국과 대립하게 되었다. 629년 9월, 무함마드는 자이드를 사령관으로 하는 군대를 시리아로 파견했으나, 동로마 군의 매복 공격으로 이슬람 군은 패배하고 자이드는 전사했다. 이때 할리드는 기지를 발휘하여 궤멸 직전의 이슬람 군을 수습하여 무사히 철수시켰다(무타 전투영어). 무함마드는 할리드의 활약에 감격하여 그를 '알라의 검'이라고 칭찬했다.
무함마드 사후, 할리드는 초대 칼리파 아부 바크르로부터 군권을 위임받아 이슬람 제국의 팽창에 크게 기여했다.
4. 무함마드 시대의 활약
629년 9월, 무함마드는 자이드를 사령관으로 하는 군대를 시리아로 파견했지만, 동로마 제국 군의 매복 공격을 받아 이슬람 군은 패배하고 자이드는 전사했다. 이때 할리드는 기지를 발휘하여 궤주하는 이슬람 군을 수습하여 무사히 철수시켰다(무타 전투영어). 무함마드는 할리드의 활약에 감격하여 그를 '알라의 검'이라고 칭찬했다.
5. 리다 전쟁
이후 할리드는 카심 지역에 본부를 둔 타미미트 족장 말리크 이븐 누와이라를 공격했다.[1] 말리크는 무함마드에 의해 타밈족 야르부족의 사다카|자선세ar 징수자로 임명되었지만, 무함마드 사후 이 세금을 메디나로 보내는 것을 중단했다.[1] 아부 바크르는 할리드에게 말리크를 처형할 것을 명했다.[1]
무슬림 전통 자료에 따르면, 632년 할리드의 군대는 말리크와 그의 야르부족 일원 11명을 만났다. 야르부족은 저항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슬람 신앙을 선포했으며, 할리드의 진영으로 호송되었다. 할리드는 안사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모두 처형했고, 이후 말리크의 미망인 움 타밈 빈트 알-민할과 결혼했다. 이 소식이 메디나에 전해지자, 우마르는 아부 바크르에게 할리드를 처벌하거나 지휘권을 박탈할 것을 촉구했지만, 아부 바크르는 할리드를 사면했다.[1]
8세기 역사가 세이프 이븐 우마르는 말리크가 예언자 사자와 협력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현대 역사가 윌퍼드 매델롱은 세이프의 기록을 신뢰하지 않으며, 말리크가 이슬람을 떠났다면 우마르와 다른 무슬림들이 할리드의 처형에 항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1]
무타 전투에서 이슬람 군을 수습하여 무사히 철수시킨 공로로 무함마드는 할리드에게 '알라의 검'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무함마드 사후, 할리드는 초대 칼리파인 아부 바크르에게 군권을 위임받아 이슬람 제국의 확장에 기여했다.
6. 이라크 정복
7. 시리아 정복
할리드는 군대가 사막을 횡단한 후 다마스쿠스 북쪽의 마르지 라히트 초원에 도착했다. 그는 그 해 부활절 날, 즉 634년 4월 24일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할리드는 부활절을 축하하는 가사니드인들을 공격했다. 그 후 할리드와 이전 무슬림 군대의 지휘관들은 보스라에 모였다. 보스라는 상업 중심지였으며, 무슬림 군대는 포위 공격 중에 미미한 저항에 직면했다. 보스라는 634년 5월 말에 항복하여 시리아에서 무슬림에게 함락된 최초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할리드와 무슬림 지휘관들은 7월에 비잔틴과의 첫 번째 주요 대결인 아즈나다인 전투에 참여했다. 전투는 무슬림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고, 비잔틴군은 펠라로 후퇴했다. 무슬림은 그들을 추격하여 파흘 전투에서 또 다른 대승을 거두었다.
다마스쿠스 포위전에서 할리드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635년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636년 봄, 할리드는 다마스쿠스에서 군대를 철수하여 골란 고원의 옛 가산 왕조 수도인 자비야로 이동했다. 그는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파견한 대규모 비잔틴 군대의 접근에 의해 촉발되었는데, 이 군대는 바한과 테오도르 트리티리우스가 이끄는 황실군과 가산 왕조의 필라르크 자발라 이븐 알-아야함이 이끄는 기독교 아랍 경보병과, 게오르기우스(아랍인들은 자라야라고 부름)가 이끄는 아르메니아 보조병으로 구성되었다.
비잔틴 군대는 자비야에 있는 무슬림 진지 서쪽의 루카드 지류에 야영지를 설치했다. 그 결과 할리드는 철수하여 야르무크 강 북쪽에 자리를 잡았고, 루카드가 야르무크와 만나는 지점에 가까웠다. 636년 7월 23일, 무슬림들은 아드리'아트(현대 다라아)와 알-샤이크 사아드 근처의 캠프(데이어 아이유브) 사이의 전략적인 고지를 한 달 넘게 점령했으며, 자비야 밖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에서 비잔틴 군대를 물리쳤다.
할리드는 기병대를 두 개의 주요 그룹으로 나누어 무슬림 군대의 우익과 좌익 보병 측면에 배치하여 비잔틴 기병대의 잠재적인 포위를 막았다. 그는 200~300명의 정예 기병대로 구성된 부대를 방어선의 중앙을 지원하도록 배치했고, 데이어 아이유브 근처의 무슬림 진영에 궁병들을 배치하여 비잔틴 군대의 공격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비잔틴 군대는 무슬림 군대를 그들의 진영으로 추격했는데, 그곳에서 무슬림들은 낙타 무리를 묶어 보병이 싸울 수 있고 비잔틴 기병대가 쉽게 침투할 수 없는 일련의 방어 구역을 형성했다. 그 결과, 비잔틴 군대는 무슬림 궁병의 공격에 취약해졌고, 그 기세는 멈췄으며, 좌익이 노출되었다. 할리드와 그의 기병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비잔틴 보병과 기병대 사이의 틈을 이용하여 비잔틴 좌익을 뚫고 공격했다. 할리드는 양쪽에서 상대 기병대를 포위했지만, 의도적으로 비잔틴 군대가 보병과 멀리 떨어진 북쪽으로만 탈출할 수 있는 틈을 남겨두었다.
한편, 비잔틴 기병대는 루카드와 알란 지류 사이의 북쪽 지역으로 후퇴했다. 할리드는 그들이 재편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 추격 부대를 보냈다. 그는 밤에 작전을 수행하여 비잔틴 군대의 유일한 탈출 경로였던 루카드 다리를 점령했다. 그 후 무슬림 군대는 8월 20일에 비잔틴 군의 진영을 공격하여 대부분의 비잔틴 군을 학살했거나, 비잔틴 대열에 공포를 유발하여 서쪽으로의 퇴각을 시도하면서 수천 명이 야르무크 협곡에서 사망하게 만들었다.
야르무크 전투에서의 무슬림 승리는 할리드의 "기발함"을 보여준다. 비잔틴 군대의 패배는 시리아에서 그들의 마지막 효과적인 군대의 파괴를 의미했으며, 팔레스타인과 트랜스요르단에서 무슬림의 초기 점령을 즉시 확보하고, 12월에 아부 우바이다에 의해 다마스쿠스를 재점령하고, 베카 계곡과 궁극적으로 북쪽의 시리아 나머지 지역을 정복하는 길을 열었다.
8. 최고 사령관직 해임
초기 이슬람 자료에서는 할리드가 최고 사령관에서 해임된 다양한 이유를 언급한다. 여기에는 할리드의 독립적인 의사 결정과 메디나 지도부와의 최소한의 협의, 말리크 이븐 누와이라 처형 및 그 이후 말리크의 미망인과의 결혼을 포함한 오래된 도덕적 과실 혐의, 적격한 초기 무슬림 개종자에게 해를 끼치면서 부족 귀족에게 후한 전리품 분배에 대한 비난, 칼리드와 우마르 사이의 개인적인 반감, 그리고 무슬림 사이에서 칼리드의 영웅적인 명성에 대한 우마르의 불안감, 즉 인격 숭배로 발전할 수 있다는 우려 등이 있었다.
현대 역사가인 데 호에, 윌리엄 뮤어, 안드레아스 스트라토스는 우마르와 칼리드의 적대감이 칼리드 해임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보았다. 샤반은 적대감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칼리프의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데 호에는 칼리드가 부족 귀족에게 과도한 보상을 한 것을 칼리드 해임의 원인으로 보지 않았는데, 이는 무함마드를 포함한 초기 무슬림 지도자들의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뮤어, 베커, 스트라토스, 필립 K. 히티는 야르무크 전투 이후 시리아에서 무슬림의 승리로 인해 지휘관을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자라와 같은 유능한 행정가로 교체해야 했기 때문에 칼리드가 결국 해임되었다고 제안했다.
아타미나는 위에 언급된 모든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시리아의 많은 지역이 비잔틴의 통제하에 있었고 헤라클리우스가 이 지역을 포기하지 않았던 시기에 "필수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타미나는 "모든 군사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부 우바이다는 "칼리드의 비할 데 없는 재능을 대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로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메디나에는 정규 상비군이 없었고, 다른 전선으로 병력을 재배치해야 했으며, 시리아에서 무슬림의 승리에 대한 비잔틴의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비잔틴의 동맹자 역할을 해왔던 시리아의 오래된 아랍 부족들을 기반으로 방어 구조를 구축해야 했다. 메디나가 주요 동맹 부족인 가산 왕조에 호소했지만 거부당한 후, 칼브, 주담, 라흐므와 관계를 맺었다. 이 부족들은 칼리드 군대에 있는 많은 수의 외부 아랍 부족민들을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칼리드의 초기 병력은 500~800명이었으나, 이라크 전선이나 아라비아에서 칼리드 군대에 합류한 부족민들로 인해 10,000명까지 늘어났고, 가족을 포함하면 30,000~40,000명에 달했다. 아타미나는 우마르가 칼리드를 해임하고 그의 병력을 시리아에서 소환한 것은 칼브와 그들의 동맹에게 보내는 화해 제스처였다고 결론짓는다.
9. 북부 시리아에서의 작전
이후 북부 시리아 정복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고 부분적으로 상반된다. 할리드는 아부 우바이다에 의해 킨나스린(비잔틴 제국에서는 칼키스)과 인근 알레포를 정복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할리드는 킨나스린 외곽에서 미나스가 이끄는 비잔틴 군대를 격파했다. 그는 비잔틴 제국에 의해 강제로 징집된 아랍인이라고 호소한 주민들을 살려주었다. 할리드는 이어서 성벽으로 둘러싸인 킨나스린 마을을 포위했고,[1] 638년 8/9월에 항복을 받아냈다. 그와 이야드 이븐 가남은 최초의 무슬림 기습 공격을 비잔틴 아나톨리아로 감행했다. 할리드는 킨나스린을 본부로 삼아 아내와 함께 정착했다.[1] 할리드는 638년에 아부 우바이다의 킨나스린 부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호мс와 킨나스린에 대한 군사 작전의 결과는 북서부 시리아의 정복으로 이어졌고,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에데사의 본부를 아나톨리아의 사모사타로 옮기고, 결국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도록 했다.
10. 사망과 유산
할리드와 관련된 하디스에는 무함마드가 무슬림에게 할리드를 해치지 말 것을 촉구하고, 할리드가 이슬람에 큰 공헌을 했음에도 부당한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예언이 포함되어 있다. 이슬람 문학에서 우마르는 할리드를 해임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메디나의 여성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아타미나는 이를 "이슬람 전통에 묘사된 할리드의 영웅적인 성격에 대한 후대 사람들의 동정심 표현"이라고 본다.
12세기 시인 이븐 알카이사라니는 무하지르 이븐 할리드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지만, 13세기 역사가 이븐 칼리칸은 할리드의 혈통이 초기 이슬람 시대에 끝났다는 역사가와 족보학자들의 합의와 모순된다고 언급했다. 여성 혈통은 생존했을 수 있으며, 15세기 수피 종교 지도자 시라즈 알딘 무하마드 이븐 알리 알마크주미가 이를 주장했다. Kızıl Ahmed Bey는 오스만 제국에 합병될 때까지 아나톨리아에서 공국을 통치했던 이스펜디야리드의 지도자로, 자신의 왕조가 할리드의 후손이라고 날조했다. 16세기 인도 통치자 셰르 샤 휘하의 수르 부족 또한 할리드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아이유브 왕조(1182-1260) 시대부터 훔스는 할리드의 묘와 모스크가 있는 곳으로 명성을 얻었다. 12세기 여행가 이븐 주바이르는 이 묘에 할리드와 그의 아들 압드 알라흐만의 무덤이 있다고 언급했다. 이후 무슬림 전통은 할리드의 묘를 이 도시에 두었다. 이 건물은 살라딘()에 의해 개조되었고, 13세기에 다시 개조되었다. 맘루크 왕조 술탄 바이바르스()는 1266년 훔스에 있는 할리드의 영묘에 자신을 기리는 비문을 새겨 군사적 업적을 할리드와 연결하려 했다. 17세기 영묘를 방문한 학자 압드 알가니 안나불시는 할리드가 그곳에 묻혔다는 것에 동의했지만, 무아위야의 손자 할리드 이븐 야지드의 무덤이라는 다른 전통도 언급했다. 현재 모스크는 오스만 제국이 재건한 1908년에 세워졌다.
11. 평가
칼리드의 시리아로의 행군 출발점은 대부분의 전통적인 기록에 따르면 알-히라였지만, 알-발라두리는 아인 알-탐르로 보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사막 행군'이라 불리는 행군의 일부는 알-히라를 출발한 후 불분명한 시점에 발생했다. 이 단계에서 칼리드와 그의 병력은 500명에서 800명 사이였으며, 쿠라키르라는 우물에서 출발하여 물이 없는 광대한 사막을 6일 5밤 동안 행군하여 수와라는 장소에서 물을 찾았다. 병사들은 말과 낙타를 가지고 이 거리를 횡단할 충분한 물통을 소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칼리드는 약 20마리의 낙타가 전형적인 물 섭취량을 늘리게 하고 낙타의 입을 봉하여 낙타가 먹는 것을 막아 낙타의 위에서 물이 상하는 것을 막았다. 행군 중 매일 병사들이 낙타의 위장에 저장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낙타 여러 마리를 도살했다. 낙타를 물 저장 수단으로 활용하고 수와에서 수원지를 찾는 것은 타이에 속한 라피 이븐 암르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역사가 리처드 블랙번에 따르면, 초기 자료에서 할리드를 깎아내리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성은 무함마드, 아부 바크르 시대와 시리아 정복 시대를 거치며 "이슬람의 가장 강력한 전사"로 발전했다. 케네디는 "그의 위대한 장군으로서의 명성은 여러 세대에 걸쳐 지속되었으며, 아랍 세계 곳곳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고 언급했다.
11. 1. 긍정적 평가
초기 이슬람 자료는 할리드가 최고 사령관에서 해임된 후에도 정복 활동에서 가장 효과적인 지휘관이었다고 평가한다.[1] 도너는 그를 "초기 이슬람 시대의 전술적 천재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역사가 캐롤 힐렌브랜드는 그를 "모든 아랍 무슬림 장군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고 칭했으며, 험프리스는 그를 "리다 전쟁과 초기 정복에서 가장 유명하고 뛰어난 아랍 장군"이라고 묘사했다. 케네디는 할리드를 "뛰어나고 무자비한 군사 지휘관이었지만, 더 경건한 무슬림들은 그를 완전히 편안하게 여길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초기 이슬람 자료들은 그의 군사적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우후드 전투에서 무함마드와 초기에 대립했던 점, 리다 전쟁 동안 아랍 부족민에 대한 잔혹하거나 과도한 행동으로 평판이 좋지 않았던 점, 그리고 그의 군사적 명성이 초기 신실한 개종자들을 불안하게 했던 점 때문에 할리드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1]
11. 2. 종교적 관점
할리드는 수니파 무슬림에게는 전쟁 영웅으로 존경받지만, 시아파 무슬림들은 그가 말리크 이븐 누와이라를 처형하고 전통적인 이슬람 애도 기간을 지키지 않고 그의 미망인과 바로 결혼한 것을 전쟁 범죄로 간주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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